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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인시대* 씨름왕, 경찰 출신, 정치주먹 이정재야인시대 2017. 1. 16. 13:33336x280(권장), 300x250(권장), 250x250, 200x200 크기의 광고 코드만 넣을 수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민짱입니다.승만 자유당 정권 당시 동대문 화랑동지회를 바탕으로 무소불위 권력을 휘둘렀던
"나는 새도 떨어뜨렸다던" 동대문 사단의 이정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고향 이천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이정재는 인근 지역에서 알아주는 '씨름왕'출신 입니다.
전국규모로 이천에서 개최된 씨름대회에 출전, 상금으로 나온 황소가 모조리 그의 몫이 됐다는 일화는 오늘까지도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어 전해질 정도 입니다. 부유한 집안 형편과 부친의 든든한 지원으로 상경, 중앙고등보통학교를 거쳐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신흥대학교(경희대학교의 전신)에 진학할 만큼 당대의 엘리트였던 그는 태평양전쟁 발발 후징용을 받고 반도 의용정신대로 피신하면서 김두한과 인연을 맺습니다. 고학력자인 그를 눈여겨본 김두한의 추천으로 경찰이 된 뒤로는 그의 세력을 비호하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경찰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혀가던 중 해방을 맞았습니다.
해방 직후 혼란기에 잠시 경찰을 떠나 있었던 이정재는 다시 복직하여, 이승만 정부 수립 후 반민특위 특별조사위원회 서기이자 특경대원으로 친일파 색출에 활동을 하게 됩니다. 드라마 야인시대에도 나오듯 경찰 복무 당시에도 그는 친일과는 거리를 둔 조선인 경찰이었고, 친일경찰의 행동을 옆에서 지켜본 자로서 친일파 색출 임무에 매진했으나
1949년 6월 6일, 이승만 정권의 반민특위 습격사건으로 위원회가 와해되자 사직하고 처가가 터를 잡고 있던 동대문에서 포목점을 경영하며 세상과 조금 거리를 두고 상인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후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한 이정재는 과거에 경찰을 했다는 이유로 북한군에게 체포되어 죽음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이때 공산군으로 위장하여 도와준 김기홍 덕분에 목숨을 부지하고이 일로 인해 두 사람은 처남 매제 지간이 됩니다.이정재가 부산으로 피난 온 당시 지역 깡패와 시비가 붙어 집단 구타당한 위기에서 그를 구해준 시라소니(이성순). 전쟁 후 서울로 복귀한 뒤에도 시라소니와 이정재의 관계는 각별했으나, 동대문 상권에 얽힌 사소한 시비와 금전적인 문제로 둘의 사이는 아예 틀어져버렸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동대문 시장으로 돌아온 이정재는 고민 끝에 주먹이 되기로 결심하고 이후 김두한의 정계진출로 종로파의 조직이 사실상 정리된 이후 1953년 동대문 상인연합회를 조직해 회장에 취임, 시장점포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조열승, 차석환을 포섭하여 '가족회'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6.25전쟁 이후 파괴된 시장의 중심지 일대 3000평을 '광장주식회사'로부터 매입하여 점포를 짓고 상인들을 입주시키는 한편으로 상인들을 모두 '가족회'의 회원으로 가입시켰다. 이처럼 점차 자신의 세력을 강화시킨 이정재는 상인들의 인심을 얻기 위하여 과거 건달들이 폭력행위 및 협박, 공갈로 상인들에게 보호세를 뜯는 폐단을 없애고 상인들의 애로사항이 있으면 그것을 해결해주어 한번도 상인들의 원망을 산적이 없다고 한다. 종전의 주먹들이 구역 내 상인들에게 보호비 명목으로 세금을 걷고 폭력 갈취를 했다면 이정재는 다른 방식으로 구역과 조직을 관리했다. 말끔한 양복을 갖춰 입고 포마드로 머리를 단정하게 정리한 동대문파 일원들은 상인들에게 폭력을 일삼기는커녕 되려 상인들의 애로사항을 바로바로 접수해 깔끔하게 해결해주는 것으로 일대 상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상인들의 원망을 사지 않는 한편으로 실은 절대 밖으로 노출되지 않는 방법으로 막대한 이익을 거둬들이고 있었는데, '광장 주식회사'로부터 헐값에 거둬들인 땅을 상인들에게는 고가에 판매하여 폭리를 취한 것을 비롯, 시장의 전기/전화 관리세에 자가발전을 구실삼아 당시 가구당 300환에 불과하던 관영요금을 2000에서 2500환까지 거출하고 전화기 교환을 핑계로 7000환을 부과하는 등의 수법으로 막대한 이익을 취했다. 이러한 내막을 모르는 상인들에게서 이정재의 평판은 좋을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이정재의 세력은 날로 거대해져 경마장에까지 미쳤는데, 그가 체포되기 직전까지 시장의 규모는 종로4가에서 6가까지 이르는 7만평 규모에 2900여 점포를 아우르며 상인의 수는 약 1만 2천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 위세가 어느정도인지를 가늠하기 쉽도록 동대문파의 조직도를 기재한다. 이러한 거대한 규모 뿐만아니라 당시 혼란한 시대상으로 인하여 상당수의 총기 또한 보유하고 있었다.
이후에 1954년 사사오입 개헌 당시 국회방청객 난동, 1955년 자유당 창당동지회 방해, 1956년 대통령선거 당시 야당의 집회 방해, 1957년 장충단공원 정치테러사건의 배후에는 이정재가 있었다.
이런 거대한 이권을 쥐게 된 이정재는 동대문 광장 입구에 당시 시가 1억환에 달하는 3층 건물을 짓고 옥상에 도장을 설치하여 부하들을 육성했다. 서북청년회 출신 상이군인들에게 점포양도를 요구하던 시라소니를 이 사무실로 유인하여 손도끼 등의 흉기로 난자한 '시라소니 린치사건'을 벌이기도 했다.
또한 그의 의형제인 곽영주가 경찰이 되고 싶어하자 이정재는 경찰에게 엄청난 뇌물을 주고 곽영주를 경사로 임관시켰다. 그후 곽영주가 이승만의 눈에 띄어 이승만의 경호를 담당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이승만의 최측근이 되었고, 이정재의 위세는 자유당 이기붕의 권력을 업고 정계에까지 미치게 되어 야당인사들에 대한 집회방해, 이기붕의 자유당 의장 취임 공작 등 수많은 정치테러를 벌였다.이때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서 수많은 제3세력(야당인사)의 동시다발적 암살기도를 획책하기도 하였음이 혁명재판 당시 밝혀졌는데, 당시 암살대상이 되었던 인물로는 김태선, 신익희, 이순용, 조병옥, 장택상, 김상돈, 백두진, 문봉제 외 40여명 가량이라고 한다. 이 계획은 당시 이정재의 참모장격이었던 김동진이 경찰에 밀고함으로 무마되었다고 하는데, 이 보복으로 김동진은 단성사에서 영화 '형제는 용감하였다'를 감상하고 나오던 도중 조직원 이석재에게 저격을 받고 복부 관통상을 입기도 했다. 이 사건이 야인시대 등 드라마에서도 주요 사건으로 언급되는 '단성사 저격사건' 이다. 이 사건 역시 검찰의 수사도중 자유당의 정치적 압력으로 인해 이정재는 기소유예를 받고 풀려나게 된다.
이정재는 정치적 야망도 있어 자신의 고향인 이천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하려 했으나 1958년 이기붕이 자신의 선거구 서대문구에서 국회의원 당선이 불확실해져 선거구를 옮기려 했고 이정재가 표밭을 닦고 있던 이천을 목표로 하여 이정재에게 압력을 넣었다. 이때 이기붕과의 마찰로 인해 이정재는 이기붕의 아내 박마리아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치솟던 이정재의 권력도 이때를 기점으로 내리막을 걷게된다. 후 자유당과 결별하고 이후 직함만 1인자 자리를 유지한채 동대문 상인 연합회 회장자리를 임화수에게 넘겨 준 뒤 은퇴했다. 이후 임화수가 실질적인 동대문파의 1인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4.19 혁명 이후 검찰에 자진출두하여 정치깡패 활동으로 인해 구속이 되었다가 낮은 형량으로 석방되었으나
그 이후 박정희의 5.16군사정변이 일어나 군사정부의 조직폭력배 척결사업 대상으로 지목되어서 체포되었다. 당시 군사정부는 시라소니 린치 사건, 단성사 저격사건, 고대생 습격사건 등 이정재가 관여한 수많은 범죄를 재수사해서 혁명재판에 넘겼다. 다른 폭력조직의 증언이 폭로됨으로써 결국 혁명재판부에서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제7조 1항(단체적 폭력행위)외 11개 범죄행위로 기소되어 범죄단체 수괴로 인정되었다. 사형 판결을 받은 후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읍니다."라고 쓴 플래카드와 함께 백주의 시내에서 조리돌림 당하는 치욕을 당해야 했다.
1961년 10월 19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향년 44세. 이날 교도소장 면회라는 명목으로 이동 중 간수들이 사형장으로 방향을 틀자 이정재는 담담한 표정으로 "음 오늘이 그날이군" 이라면서 제발로 조용히 형장으로 향했다고 한다. 죽기 전에 남긴 유언은 대략 이렇다.
"나도 잘못은 있기에 억울하다는 말은 안한다. 그런데 죄다 나에게만 책임을 넘기고 자신은 억울하다는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 적어도 자기 잘못은 인정하라고 말하고 싶다."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이 모습을 본 김두한이 나중에 회고하길, "그때 내가 싸웠더라면 정재가 저렇게 되지 않았을지도 몰라."라며 한탄하는 장면이 나왔으며, 같은 드라마에서 국회에 난입한 이정재와 한 번 맞붙으려다가 참고 김두한이 물러난 적이 있었다. 유지광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 무풍지대에선 김두한이 "잘못했어. 그때 정재가 국회에 들어왔을 때 그놈의 국회의원 뱃지고 뭐고 다집어던지고 정재를 눌러야했어....그놈의 이정재도 안 죽고, 유지광이도 안 죽고....눌러야했어...그래야만 그놈들을 살릴 수 있었는데..."라는 대사를 한 바 있다. 방학기 만화 감격시대에서도 나오는데 여기선 술자리를 하던 김두한이 비슷한 말을 한다. 그만큼 아주 비참하게 쳐다봤던 모양이다.
[참고]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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