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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인시대* 연예계 대부, 황태자 "임화수" 그리고 눈물의 곡절
    야인시대 2017. 1. 23.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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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대문사단의 2인자이자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앞잡이 노릇을 한 대한민국 정치깡패 겸 영화 제작자이다 

    경기도 여주출신으로서 원래 본명은 권중각이였으나, 어머니가 재혼을 하면서 새아버지의 성이 임씨를 따라서 이름을 바꾸어서 임화수가 되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 폭력과 소매치기, 장물취득 등의 죄목으로 형무소를 들락거렸다. 학식은 거의 없어 눈물의 곡절에게 한글을 배우는 모습이 나오긴 하나, 영화를 좋아해서 극장 직원으로 일하다가 해방 이후 일본인이 경영하던 평화극장이 적산자본으로 풀리면서 임화수가 거의 껌값으로 인수하게 되었다. 그것을 바탕으로 영화사를 창업하며 영화계와 연예계의 대부로 떠오르게 되었다. 여주 옆 동네인 이천 출신인 이정재와의 인연으로 임화수는 이정재의 동대문 사단에서 2인자로 군림하게 되었으며, 이승만대통령의 경호 책임자이자 권력 실세인 곽영주와의 친분을 바탕으로 권력의 비호를 받아 영화계와 연예계를 장악하게 되었다. 그런데 임화수가 제작한 영화는 대부분이 자유당과 이승만 정권을 찬양하는 관제영화가 대부분이었고, 대표적인 작품이 이승만에 제작한 독립협회와 이승만. 이 영화를 제작할 당시 자유당으로부터 무려 4천만 환이라는, 당시로선 천문학적인 거액을 지원받았고 이승만의 좋은 점만 나타내는 영화를 제작했다. 그런데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후 임화수는 아아, 백범김구 선생이란 영화를 제작했는데, 여기서는 백범 김구를 찬양하고 이승만은 찌질한 인물로 바꾸어 놓았다. 이 일은 잘한 일 인것 같다.

     

    명색이 영화인이라고는 하나 출신이 깡패였던 만큼 본색은 어쩔 수 없었고, 걸핏하면 남자 연예인들을 구타했다. 대표적 사건이 임화수 자신이 주최한 반공 예술인단 행사에 불참했다는 이유로 당대 최고의 희극배우인 김희갑을 구타하여 늑골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힌 소위 합죽이 구타사건이 그것. 사실 임화수라는 이름이 세간에 알려진건 바로 이 김희갑구타 사건 때문이다.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도 임화수가 최무룡을 구타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걸 본 아들 최민수가 아버지를 모욕했다며 소송드립을 치기도 했다.

    거기다 임화수는 권력과 더욱 밀착하기 위해 미모의 여배우나 가수들에게 성상납을 강요하는 안 좋은 관행을 만들었다. 곽영주의 주선으로 경무대에서 대통령 이승만을 처음 만났을 때 다짜고짜 큰절을 올리면서 "마치 돌아가신 아버님을 뵙는 것 같습니다. 각하, 아버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라고 눈물을 펑펑 쏟자 이것에 껌뻑 죽은 이승만이 임화수를 아들이라면서 총애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자유당 정권 말기에는 이승만의 대통령 4선과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을 위해 소위 반공 예술인단을 조직하여 연예인들을 자유당 선거운동으로 내몰았다. 위에 언급한 김희갑 구타사건도 당시 김희갑이 다른 스케줄을 핑계로 선거운동용 행사에 불참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권력의 비호를 받고 있던 덕분에 고작 3만환 벌금으로 약식기소 되는 것에 그쳤다.

     

    1958년 자유당 감찰부장 등 당직을 맡고 있던 이정재가 이기붕과의 국회의원 선거구 문제로 갈등을 빚은 끝에 당직을 내려놓고 조직에서도 은퇴한 후, 임화수는 이정재의 지명으로 동대문 사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또한 자유당이 조직한 소위 반공청년단에 참여해 스스로 종로구단 책임자를 맡았고 유지광 등에게 지시하여 조병옥 등 야당의 거물 정치인들에게 테러를 자행했다.

    임화수가 저지른 결정적인 정치 테러는 1960년 4월 18일에 일어난 고대생 습격사건
    으로, 이 사건은 임화수의 명줄을 단축하는데 결정적인 단초가 되었다. 4.19 이후 정치테러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6개월만 받고 얼마 안 가 풀려났지만, 5.16군사정변 이후에 혁명군에게 체포, 다시 재판에 회부되었다.
    혁명재판에서 임화수는 뻔뻔스럽게도 자신만 살아남으려 3.15부정선거에 개입한 것과 각종 정치테러 및 고대생 습격사건이 이정재의 지시로 일어난것이라고 우기면서 어떻게든 발을 빼려고 했다. 이정재가 사형당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소위 화랑동지회 사건도 임화수의 폭로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모든 잘못을 이정재에게 덮으면서도 자긴 잘못이 없다던 이 재판 당시 옆에 있던 유지광이 이성을 잃고 포승에 묶인 몸으로 임화수에게 죽일 듯이 달려들었는데 같이 있던 최인규 전 내무장관의 만류로 겨우 진정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사형집행 당일, 사형장에 끌려오면서도 살고 싶다며 몸부림을 치다가 사형장에 들어와서는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금강경 몇줄을 읊은 후 1961년 12월 21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임화수의 시신은 일명 "눈물의 곡절"이라 불렸던 그의 수행비서 차민섭이 수습했다고 한다.

    [출처] 나무위키

     

    *눈물의 곡절 - 차민섭*

    본명은 차민섭으로

    야인시대에서 눈물의 곡절은 임화수의 개인비서로 나옵니다. 극장의 개인비서로 있으면서 맞는 장면이 주로 나옵니다. 일본 유학파 출신에 동경대를 졸업하고 평화극장 사장아들로 부잣집에서 태어났으나 광복이후 몰락했다고 합니다. 평화극장 말단으로 일하던 임화수가 극장을 인수하여 그 밑에서 일하게 됬다고 합니다. 눈물의 곡절이란 별명의 유래는 차민섭이 자신의 일기에 '일자무식 임화수는 떵떵거리며 잘사는데 몰락한 자신은 고작 임화수의 비서로 있으니 눈물의 곡절일 따름이다'라고 썼다가 들켜 두들겨 맞았고 이게 고스란히 별명이 됐다고 한다. 하단의 드라마에도 임화수가 그 이후 이 일기 내용떄문에 드라마에서 맞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상당히 의리파이며 이렇게 당했음에도 사형을 당하고 시신을 수습하고 남겨진 홀어머니를 정중히 모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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