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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월 14일은 발렌타이데이도 있지만 "안중근 의사 사형선고일"
    이슈 2017. 2. 14.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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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14일은 발렌타이데이도 있지만

     

     

    안중근의사님은 독립운동가로 1879년(고종 16)에 태어나 1910년 3월 26일날 순국하셨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을 위협해 을사늑약을 강제체결시켜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을 강제퇴위 시켰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늑약 이후 초대 통감으로 취임해 조선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하였습니다.

    심지어 을사늑약에 공을 세운 을사오적(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을 중심으로 새로운 내각을 조직해 운영되고 있었고 이토는 러시아와 철도 문제 경제현안, 러일전쟁의 뒤처리 등을 논의하기 위해 하얼빈에 방문하게 됩니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를 태운 특별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토는 코코프체프와 약 25분간의 열차 회담을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 이토가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환영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하얼빈역에 잠입한 안중근이 뛰어나오며 권총을 발사, 이토에게 3발을 명중시켰다.

     

    안중근 의사는 즉시 청국과 러시아의 호위병들에게 체포되었고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를 외쳤습니다.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에서 한국의용병 참모중장, 나이 31세로 자신을 밝혔다. 거사 동기에 대한 질문을 받자 이토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님을 밝혔다.

     

    관동도독부지방법원 원장 마나베의 주심으로 여섯 차례의 재판을 받았다. 안중근은 자신을 일반 살인피고가 아닌 전쟁포로로 취급하기를 주장하였다. 국내외에서 변호 모금운동이 일어났고 변호를 지원하는 인사들이 여순에 도착했으나 허가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일본인 관선 변호사 미즈노와 가마타의 변호사조차 허가하지 않으려 하였다.

     

    재판과정에서의 정연하고 당당한 논술과 태도에 일본인 재판장과 검찰관들도 탄복하였다. 관선 변호인 미즈노는 그의 답변 태도에 감복해 “그 범죄의 동기는 오해에서 나왔다고 할지라도 이토를 죽이지 않으면 한국은 독립할 수 없다는 조국에 대한 적성()에서 나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변론하였다.

     

    언도 공판은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30분에 개정되었고 재판장 마나베는 사형을 언도하였다. 죽음을 앞둔 며칠 전 정근·공근 두 아우에게 “내가 죽거든 시체는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하지 말라.……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하였다.

     

    3월 26일 오전 10시, 여순감옥의 형장에서 순국하였다. 그의 일생은 애국심으로 응집되었으며, 그의 행동은 총칼을 앞세운 일제의 폭력적인 침략에 대한 살신의 항거였다.

     

    *안중근 의사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

    장한아들아 보아라. 내가 만일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오늘 우리가 초콜릿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것도 안중근의사님과 같이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분들이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2월 14일이 발렌타이데이와 더불어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안중근의사를 다시 한번 생각하는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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